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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의 세계화는 한국 미술이 형식적 추상을 넘어 철학적 사유의 영역으로 확장된 과정을 보여준다. 1970년대 한국 단색화는 반복, 비움, 물질의 수행성을 통해 동양적 미학을 구현하며, 오늘날 세계 미술계에서 한국적 현대성의 정수를 대표한다.
세계로 확장된 한국적 추상의 철학
1970년대 한국 단색화(Dansaekhwa)는 단순히 색을 최소화한 회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었다. 서구의 미니멀리즘이나 추상표현주의가 형식적 실험에 초점을 맞췄다면, 단색화는 그 형식 속에 ‘정신의 흐름’을 담았다.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하종현, 정상화 등 작가들은 반복과 절제, 물질의 흔적을 통해 ‘행위로서의 회화’, 즉 존재의 수행을 시각화했다.
이 글은 1970년대 단색화의 태동에서부터 2010년대 이후 국제적 재조명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이 세계미술사 속에서 구축한 철학적 정체성을 분석한다.
1. 1970년대의 태동 — ‘형식’에서 ‘사유’로
한국 단색화의 시작은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을 넘어, 동양적 사유의 내면화로부터 비롯되었다. 1970년대 초,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정치적 억압 속에서 정신적 긴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작가들은 이 불안한 시대에 ‘정신의 질서’를 찾는 회화적 수행을 시도했다.
박서보는 〈Ecriture〉( écriture, ‘쓰기’라는 뜻) 시리즈를 통해 ‘그리기’와 ‘쓰기’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그는 캔버스 위에 연필로 선을 긋고, 마르지 않은 물감을 긁어내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 행위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작가의 내면을 기록하는 **‘수행적 행위(Performative Act)’**였다.

윤형근의 작업 역시 색과 물질의 철학적 통합을 보여준다. 그의 대표작 〈Burnt Umber & Ultramarine〉은 두 색이 캔버스 위에서 섞이지 않고 겹쳐지며, 하늘(푸른색)과 땅(갈색)의 경계를 형상화한다. 그는 이를 통해 “인간은 자연 속의 존재”라는 동양적 사유를 시각화했다.
당시 단색화 작가들은 국전이나 상업 화랑보다 **‘공간’과 ‘시간’**을 사유하는 독립적 전시를 추구했다.
1975년 《현대한국미술 75》(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이러한 움직임의 집대성이었다. 이 전시는 단색화가 하나의 경향이 아니라 한국적 철학의 미학적 실천임을 보여주었다.
2. 물질과 행위 — 단색화의 수행적 미학
단색화의 본질은 ‘물질을 통해 정신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 서구의 미니멀리즘이 기하학적 순수성을 강조했다면, 한국의 단색화는 반복과 물질성, 그리고 **‘손의 노동’**을 통해 인간적 깊이를 부여했다.
하종현의 대표작 〈접합(Conjunction)〉 시리즈는 캔버스의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내는 독특한 방식으로 제작된다. 작가는 캔버스의 틈을 통해 물감이 스며들게 하여, 표면과 이면, 안과 밖의 경계를 사유한다. 이러한 행위는 **‘회화적 명상’**이자, 세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철학적 제스처였다.
정상화의 〈무제〉 연작은 균열과 균질의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다. 캔버스 위의 미세한 금은 단순한 표면 효과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과 시간의 흔적을 상징한다. 그의 작업은 “비워냄 속에서 형태가 태어난다”는 불교적 사유를 반영하며, 단색화의 미학을 물질적 차원에서 확장시켰다.
단색화는 이처럼 형태 이전의 ‘존재’, 시각 이전의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었다.
그들에게 물감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숨’이고, 선은 ‘기도’였다.
3. 2010년대 이후 — 세계로 확장된 단색화
2010년대 들어, 단색화는 국제 미술계에서 ‘재발견’되었다.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부속전시 《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가 이탈리아 팔라초 콘타리니에서 열리며 단색화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뉴욕, 런던, 파리, 홍콩 등 주요 갤러리들이 잇따라 단색화 작가들의 회고전을 열었다.
대표적으로 블룸앤포 갤러리 런던(Bloom & Poe), **도미닉 레비 갤러리(Dominique Lévy)**에서 열린 《Dansaekhwa》(2015)는 서구 비평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은 단색화를 서구 미니멀리즘과 비교하며, 오히려 ‘시간과 존재의 미학’으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박서보의 작품은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과 파리 퐁피두 센터(Pompidou Centre)에 소장되었으며, 윤형근은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Yun Hyong-keun》, 2019).
이처럼 단색화는 더 이상 지역적 미술이 아닌, 철학적 보편성을 지닌 동양적 추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배경에는 ‘동양적 사유의 세계화’라는 문화적 흐름이 있다. 서구 사회가 산업화 이후의 정신적 공허 속에서 명상, 반복, 비움의 미학을 갈망했을 때, 단색화는 그 욕망에 응답했다. 그것은 단순히 한국 미술의 수출이 아니라, 동양 철학의 시각적 번역이었다.
4. 단색화 이후 — 현대적 계승과 변주
오늘날 단색화는 단일한 미학이 아니라, 계속되는 사유의 과정으로 진화하고 있다.
젊은 작가들은 박서보와 윤형근의 미학을 계승하되, 디지털 미디어와 설치, 영상 등으로 확장하고 있다.
예컨대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단색화 이후: 반복과 비움의 확장》 전시는 단색화의 정신을 21세기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사례였다.
이 전시에서는 최수앙, 정혜윤, 김희천 등의 작가들이 단색화의 “수행적 반복”을 디지털 알고리즘과 인터랙티브 미디어로 확장시켰다.
이 흐름은 단색화가 더 이상 과거의 양식이 아니라, 철학적 태도로서의 현대성임을 증명한다.
단색화는 “형태를 없애는 회화”가 아니라 “존재를 되묻는 사유의 회화”로 살아남았다.
결론. 단색화, 한국 미술의 철학이 된 세계의 언어
단색화의 세계화는 단순한 미술사적 성공담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적 사유가 세계의 언어가 된 과정이었다.
서구의 시선이 기술과 형식에 머물 때, 단색화는 ‘비움의 미학’, ‘존재의 반복’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물음을 제기했다.
박서보의 선, 윤형근의 색, 하종현의 질감은 모두 “인간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의 다른 언어였다.
이제 단색화는 한국 미술의 한 장르를 넘어, 세계 철학적 미학의 장 속에서 논의된다.
그것은 한국 미술이 서구 중심의 미술사에 균열을 내고, ‘동양적 현대성’이라는 새로운 문법을 제시한 역사적 사건이다.
즉, 단색화의 세계화는 곧 한국 미술의 정신이 세계의 예술로 번역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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