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1950~60년대 한국에서 열린 주요 전시를 통해 추상미술이 어떻게 태동하고 확산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제1회 현대미술가협회전, 국전(國展), 신조형파 등의 전시를 중심으로 한국 추상의 근원과 예술가들의 시대적 실험을 조명한다.
전후의 잿더미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언어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예술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했던 시기였다. 전통과 단절된 현실, 근대화의 압력, 그리고 서구 미술의 급속한 유입 속에서 예술가들은 새로운 표현의 길을 모색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추상미술’**이었다.
추상은 단순히 형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 존재의 근원에 닿고자 하는 예술적 사유의 전환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과 사회의 불안 속에서, 작가들은 구체적 대상 대신 내면의 진동, 정신의 울림을 캔버스에 옮겼다. 이러한 흐름은 전시라는 공적 장을 통해 사회적 담론으로 확장되었으며, 바로 그 지점에서 한국 추상미술의 태동이 이루어졌다.
1. 전후의 불안과 자유의 탐색 — 추상으로 향한 첫걸음
1950년대 초 한국 미술계는 혼란과 공백의 시기였다. 미술학교와 화랑이 파괴되고, 예술인들은 생존 자체가 어려운 현실에 처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일부 젊은 작가들은 기존의 사실주의를 넘어선 ‘형태의 자유’를 꿈꾸었다.
1957년 결성된 **‘현대미술가협회’**는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이었다. 그들이 개최한 제1회 현대미술가협회전(1957, 중앙공보관)은 한국 추상미술의 실질적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참여 작가로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문학진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서구의 앵포르멜(Informel)과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등 새로운 미학을 각자의 방식으로 수용했다.
특히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유영국의 〈구성〉 연작은 감정과 색채, 리듬의 추상화를 통해 전쟁 이후의 상처를 시적 감성으로 전환한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전시는 단순히 새로운 형식의 실험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세계와 함께 현대미술이 시작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관객들은 처음으로 **‘비대상적 예술’**을 목격하며 충격과 논쟁에 휩싸였다. 이로써 전시는 미학적 실험이자 사회적 사건이 되었다.

2. 국전과 제도적 갈등 — 추상의 제도권 진입
1950년대 중반 이후, 추상미술은 점차 제도적 영역에서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국전(國展,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은 여전히 사실주의 중심의 보수적 경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일부 젊은 작가들이 이 제도 안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열기 시작했다.
1959년 제8회 국전에서는 김창열, 박서보, 하인두 등이 비구상 작품을 출품해 심사위원단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과연 그림인가?”라는 보수 진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추상은 점차 현실을 대체할 정신적 언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로 접어들면서,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도시화는 예술의 감각에도 변화를 주었다. 작가들은 구상적 재현보다는 **‘형태의 본질’과 ‘표면의 물질성’**에 주목했다. 이는 서구 미술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한국적 감성과 시대적 현실이 교차한 **‘혼성적 추상’**으로 발전했다.
특히 박서보의 초기 앵포르멜 작업은 서구의 거친 질감 위에 한국적 절제와 명상의 미학을 더해, 이후 단색화의 전조로 평가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시를 통해 사회적으로 가시화되며,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축이 되었다.
3. 신조형파와 새로운 실험 — 형태를 넘어 정신으로
1960년대 초 등장한 ‘신조형파’(Neo-Form Group) 는 한국 추상미술의 진정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이들은 1962년 인사동 국전화랑에서 제1회 전시를 열고, “형태의 단순화, 정신의 순화, 표현의 절제”를 예술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박서보, 김창열, 권영우, 하인두 등 주요 멤버들은 물질의 흔적 속에 정신적 울림을 찾는 작업을 시도했다. 캔버스 표면의 긁힘, 중첩된 색면, 반복된 선의 리듬은 단순한 조형 실험이 아니라, 한국인의 내면과 전통적 명상의 미학이 결합된 사유의 공간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전시 중 하나인 〈신조형파 제3회전〉(1964, 중앙공보관)은 한국 추상이 단순한 서구 수용 단계를 넘어, 자생적 미학의 형성기로 접어들었음을 상징했다.
또한 1965년 파리에서 열린 〈École de Séoul〉전은 한국 작가들이 국제무대에 처음 집단적으로 진출한 사례로, 국내 추상미술이 세계미술사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국내 전시 → 국제 전시’로 이어지는 미술 교류의 새로운 경로를 열었다.
이러한 추상미술의 확산은 전시 공간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등장한 화랑문화—특히 중앙공보관, 미도파화랑, 덕수궁미술관—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실험의 장을 제공했다. 이전까지는 국전 중심의 제도적 구조 속에서 예술이 평가되었지만, 민간 화랑의 등장은 작가 개인의 표현을 존중하는 새로운 예술 생태계를 형성했다. 추상 작가들은 이 공간에서 구상적 재현을 벗어나 자유로운 조형 실험을 이어갔고, 이는 곧 ‘한국적 현대미술’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또한 당시 비평가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이일, 윤범모, 오광수 등 평론가들은 추상의 의미를 철학적·정신적 측면에서 분석하며, 단순한 서구 모방이 아니라 한국적 미의식의 발현으로 해석했다. 이처럼 예술가, 비평가, 전시공간이 삼위일체로 맞물리면서 한국 추상미술은 단순한 형식적 유행을 넘어, 한 사회의 문화적 자각을 담은 사상적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결론. 추상의 탄생은 곧 한국 현대미술의 탄생이었다
1950~60년대의 추상미술은 단순한 양식 변화가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의 정신적 기원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작가들은 내면의 질서를 찾고자 했으며, 추상은 그들의 존재 증명이었다. 전시들은 이러한 실험을 사회적으로 제도화하고, 관객에게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특히 현대미술가협회전, 국전, 신조형파전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한국적 현대성’**의 문제를 탐색했다.
이 시기의 작가들이 구축한 조형 언어는 이후 단색화, 미니멀리즘, 그리고 1980년대 민중미술까지 이어지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기반이 되었다. 추상은 단순히 형상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시대의 흔적을 색과 질감으로 새기는 행위였다.
따라서 1950~60년대의 전시는 단순한 미술사의 한 장면이 아니라, 예술이 현실을 초월해 인간의 정신을 구원하려 했던 시대의 기록으로 남는다. 오늘날 한국의 추상미술은 그 시절 전시들이 남긴 실험의 흔적 위에서 여전히 새로운 형태를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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