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대 일본화 전시를 통해 본 한국 회화의 길

📑 목차

    근대 일본화 전시를 통해 일본의 서양화 제도와 전시문화가 일제강점기 한국 회화 형성에 미친 영향을 탐구한다. 조선미술전람회부터 현대 한일 교류전까지, 전시라는 제도가 어떻게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만들어냈는지 살펴본다. 일본 서양화 전시가 한국 근대미술의 형성과정에 어떤 자극이 되었고, ‘일본화(日本畫)’에서 출발한 한국 회화가 자신만의 길을 어떻게 진화시켰는지, 전시와 제도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동아시아 회화 교차로에서 일본화가 한국 회화에 던진 과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동아시아 미술은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빠르게 서구의 회화양식을 수용했고, 일본화(日本畫) 및 서양화(洋画)의 이분구조 속에서 근대화를 추진했다. 국립중앙박물관+2Seoul National University+2
    한국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본의 미술제도, 전시제도, 일본 유학파 화가들의 영향 하에 회화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으로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운영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은 일본의 서양미술전 양식을 한국에 이식한 대표적 제도였다. 위키백과

     

    본 글에서는 일본 서양화 전시가 한국 회화의 제도적 조건을 어떻게 설치했으며, 이후 한국 화가들이 이를 어떻게 수용·변형해 나갔는지를 ‘전시’라는 미술사적 사건을 통해 조명하고자 한다.

    1. 일본 서양화 전시의 형성과 한국 회화 수입망

    일본에서의 서양화 양식은 메이지시대 이래 근대화의 일환으로 적극 수용되었다. 예컨대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유럽으로 유학하고 귀국해 전시를 열면서, 일본 내에서 ‘서양화’는 하나의 제도적 장(場)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서는 이 흐름이 일본 유학파 화가 및 전시제도의 도입을 통해 이어졌다. 한국의 미술계에서는 1910년대 이후 일본에서 회화를 배운 화가들이 귀국하여 작업하고, 경성(京城)·부산·대구 등지에 화실을 개설했다. 이들이 일본화의 제도와 서양화의 제도를 한국화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Fascination of Europe: Western‑Style Paintings in Modern Japan(2008 – 2009)은 근대 일본 서양화 회화 작품을 한국에 소개한 기획전으로, 일본화가 한국 회화에 미친 영향을 제도적·미술사적 차원에서 알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이 전시는 일본 근대 서양화가들이 유럽 회화를 어떻게 수용했고, 그것을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어떻게 변형했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한국 회화 수용사의 거울 역할을 했다. 일본의 제도화된 ‘서양화 전시’ 장은 한국의 회화가 진입해야 할 통로이자, 넘어야 할 경계였다.

    2. 한국 회화의 제도화: 일본 전시문화의 수용과 변용

    한국 회화사는 일본의 전시·제도망을 통해 수입된 면이 크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 미술전람회의 제도적 틀을 모델로 한 것이며, 심사관 대다수가 일본인이었고 작품 제출 및 선발 방식도 일본의 서양화전 방식과 유사했다. 위키백과
    이 제도 속에서 한국 화가들은 ‘서양화’ 또는 ‘일본화’라는 틀 안에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일본화 기법이나 서양화 재료에 익숙해졌고, 일본 유학이나 일본미술학원을 통해 교육을 받았다. 예컨대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은 일본을 거쳐 귀국한 뒤 경성서화미술원 등을 설립하며 한국 근대회화의 토대를 놓았다. 위키백과
    동시에 한국 화가들은 단지 수용자로 머무르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화 및 서양화의 제도를 넘어서기 위해 한국적 정체성, 전통회화적 요소, 민속적 이미지 등을 회화 속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회화’의 고유한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유영국, 이중섭, 나혜석 등은 일본과 서양의 회화제도 속에서 교육받은 뒤 자신만의 미감을 개발했다. 이른바 ‘한국적 근대회화’의 형성이 이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3. 전시를 통해 본 한국 회화의 전환과 계보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보여주는 무대가 아니라, 미술사의 통로이자 제도적 전환의 지점이다. 한국 회화도 마찬가지였다. 1930–40년대 조선미술전람회는 한국 회화의 근대적 형식이 무엇인가를 공적 공간에서 시험하고 조율한 장이었다.
    이 전시를 통해 한국 화가들은 일본화·서양화라는 외부 언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려 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전시 환경이었다. 출품 방식, 심사 기준, 카탈로그 제작, 작품 진열 방식 등이 모두 일본화의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의 틀을 통해 한국 회화는 자기적 재해석을 꾀했다.
    현대 들어서는 한국–일본 간 공동전시, 연구협력이 증가해왔다. 예컨대 2025년 요코하마미술관에서 열리는 Art between Japan and Korea since 1945 전시는 일본과 한국 미술 관계사를 ‘전시’라는 매체로서 탐구한다. yokohama.art.museum

    1945년 이후 한일미술 로드무비
    1945년 이후 한일미술 Art between Japan and Korea since 1945’, 요코하마미술관 2025–26

    이 전시는 일본 서양화 제도, 한국 회화 제도, 양국의 역사적 교류를 작품과 전시 구성을 통해 재구성한다. 이를 통해 한국 회화가 단순히 일본 모델을 따랐던 것이 아니라, 제도 내부에서 회화적 실험을 거쳐 독자적 길을 개척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은 오늘날 동아시아 미술사의 재조명 속에서도 중요한 담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근대 일본화 전시는 단순한 영향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각문화의 교차와 번역의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국 화가들이 일본에서 배운 것은 단지 기법이 아니라, ‘현대적인 감각으로 전통을 다시 읽는 방법’이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긴장과 모순이 오히려 한국 회화의 독창성을 자극했다. 실제로 1940~60년대의 화가들은 일본의 미학을 완전히 모방하기보다, 자신들의 삶과 정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에 그 언어를 활용했다. 오늘날 〈Art between Japan and Korea since 1945〉 같은 전시가 보여주듯, 양국의 예술은 대립보다는 감각의 상호 번역 속에서 발전해왔다. 결국 한국 근대 회화의 길은 일본화의 그림자 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 그림자를 통과하며 자신만의 빛을 찾은 여정이었다.

    결론. 일본화 전시가 한국 회화에 남긴 유산

    근대 일본화 전시는 한국 회화가 형성되는 데 있어 제도적 기초이자 전시적 계기였다. 일본에서 구축된 서양화 전시 제도는 한국 화가들이 진입해야 할 장이었고, 이 제도를 통과하며 한국 회화는 제도화된 전시 경험을 획득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었다. 한국 회화는 일본 전시제도를 거쳐 자신만의 정체성과 시각언어를 마련했다. 전시라는 제도 안에서 일본화·서양화의 이중구조를 통과한 한국 회화는, 이후 해방 이후와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근대 회화의 계보’를 형성했다.
    오늘날 한국 미술관에서 열리는 일본 회화와 한국 회화의 비교전시는 그 자체로 ‘제도를 통한 시각문화의 형성’이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일본화 전시가 던진 과제는 한국 회화가 스스로의 시각을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그 시각은 제도의 틀 속에서 태어나, 전시의 회로를 통해 세계 속으로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