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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에서 박수근까지: 전후 한국미술의 인간적 시선

📑 목차

    전후 한국미술의 인간적 회화를 대표한 이중섭과 박수근의 작품 세계를 통해, 예술이 인간의 감정과 존엄을 회복하는 힘을 탐구한다.

    전쟁 이후의 예술, 인간을 다시 그리다.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다시 삶을 세워야 했다. 폐허 속에서 예술가들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이념과 제도의 틀보다 더 깊은 곳, 인간의 내면과 감정, 그리고 일상의 진실이 그들의 주제가 되었다. 그 중심에 이중섭(1916–1956)과 박수근(1914–1965)이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재료와 표현 방식을 가졌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을 그렸다. 그들의 회화는 전후의 절망 속에서도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기록이었다. 202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전시 **〈이중섭과 박수근: 인간의 눈으로〉**는 이 두 화가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어떻게 ‘인간의 미학’을 확립했는지를 새롭게 조명한다.

    1. 이중섭 — 감정의 폭발로 인간을 그린 화가

    이중섭의 그림은 절규하면서도 아름답다. 그의 대표작 〈피난민의 가족〉(1951)은 전쟁의 고통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를 끌어안은 가족의 모습 속에는 상처와 희망, 두려움과 사랑이 동시에 숨 쉬고 있다. 그는 거칠고 흔들리는 선으로 인간의 불안을, 그리고 굳게 포개진 팔로 인간의 연대를 표현했다. 붓질은 거칠지만 그 안에는 강렬한 생명감이 있다. 그에게 그림은 감정의 언어이자 생존의 증언이었다.

     

    이중섭의 대표적 상징인 ‘소’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대변한다. 〈흰 소〉(1954)와 〈황소〉(1953)는 그가 품은 인간적 의지를 가장 강렬히 드러낸다. 소는 가족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힘이자, 절망 속에서도 삶을 밀고 나가는 존재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그의 편지화에서도 이어진다. 가족에게 보낸 그림 편지 속에는 따뜻한 애정과 고단한 현실,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외로움이 함께 담겨 있다.

     

    2024년 부산시립미술관 특별전 **〈이중섭, 삶을 그리다〉**는 그의 은지화와 유화를 통해 ‘감정의 기록으로서의 회화’를 재조명했다. 관람객들은 그림을 통해 예술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이중섭의 회화는 비극을 미학으로, 슬픔을 사랑으로 전환시킨 예술적 치유의 언어였다.

    2. 박수근 — 침묵과 질감으로 삶을 새긴 화가

    박수근은 전쟁 이후의 시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는 세상의 소음보다 인간의 내면을 들었다. 〈빨래터〉(1954), 〈시장〉(1959), 〈나무와 두 여인〉(1962) 등 그의 작품들은 고단한 삶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박수근의 회색 화면은 가난을 상징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흔적이자 견디는 삶의 색이었다. 그의 마티에르는 단단하고 투박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선함과 연대의 감정이 서려 있다.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1962) 캔버스에 유채, 리움미술관 소장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1962) 캔버스에 유채, 리움미술관 소장

     

    박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세속적 욕망이나 사회적 이념보다, 사람의 얼굴과 손길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그의 회색은 단조롭지만 결코 무채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인내의 빛, 고요한 평화의 색이었다. 2025년 원주의 **박수근미술관 기획전 〈그림 속의 사람들〉**은 그의 회화 속 인간적 온기를 다시 조명했다. 관람객들은 화면을 통해 소박한 삶의 품격과 인간다움의 미학을 느꼈다.

     

    박수근의 회화는 조용하지만 무겁다. 그 안에는 일상의 숭고함이 있다. 빨래하는 여인의 팔,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손길,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그는 인간 존재의 품위를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전후 한국미술이 보여준 가장 깊은 인간학이었다.

    3. 인간을 중심에 둔 리얼리즘의 미학

    이중섭과 박수근은 전후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인간 중심 리얼리즘’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들의 표현 방식은 대조적이다. 이중섭은 감정의 폭발로 인간의 내면을 드러냈고, 박수근은 침묵의 질감으로 인간의 존엄을 새겼다. 전자는 절규의 미학이라면, 후자는 인내의 미학이었다. 그러나 그 둘을 잇는 공통된 핵심은 ‘인간에 대한 신뢰’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의 2024년 전시 **〈근대의 초상: 인간을 그리다〉**는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등 전후 작가들을 통해 예술이 인간을 어떻게 회복시켰는지를 탐구했다. 전시는 “전쟁 이후의 예술은 인간의 얼굴을 다시 그리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 결과, 전후 미술은 추상이나 형식보다 인간의 감정과 윤리를 중시하는 ‘감성적 리얼리즘’으로 발전했다.

     

    이중섭의 붉은색은 감정의 불꽃이었다. 박수근의 회색은 삶의 온도였다. 색은 다르지만 그들이 표현한 감정의 본질은 같았다. 두 화가 모두 색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시각화했다. 그들의 회화는 단순한 미술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학이자 윤리학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일상과 감정을 주제로 회화의 본질을 다시 탐구하는 이유도 이 두 화가의 정신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최근 미디어아트를 결합한 현대 작가들은 박수근의 질감과 이중섭의 감정 구조를 디지털 감성으로 재해석하며, ‘인간의 감정’을 다시 예술의 중심으로 끌어오고 있다.

    결론.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본 화가들

    이중섭과 박수근은 전후의 절망 속에서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술은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삶을 회복하는 언어였다. 이중섭은 뜨거운 선으로, 박수근은 단단한 질감으로 인간의 감정을 기록했다. 그들의 회화는 시대의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전환시킨 예술적 윤리이자, 한국 근대미술이 이룬 가장 숭고한 인간학이었다.

     

    202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 **〈이중섭과 박수근: 인간의 눈으로〉**는 이 두 화가의 시선이 여전히 현재의 예술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관람객들은 그들의 그림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온기를 느낀다. 그림 속 인물들은 말없이 서 있지만, 그들의 눈빛은 세상을 품고 있다.

     

    이중섭의 선이 떨리고 박수근의 질감이 무거운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은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예술이 감정의 기록이라면, 그들의 그림은 가장 인간적인 감정의 역사다. 오늘날에도 그들의 회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