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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위미술의 등장: 1970년대 ‘행동과 개념’의 미학

📑 목차

    한국 전위미술의 등장은 1970년대로 행동(happening)과 개념(conceptual art)을 통해 사회·정치·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본 글은 집단 「제4집단」, 「ST 그룹」,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전시 등을 중심으로 한국 전위미술의 출발과 의미를 탐구한다.

    행동과 개념으로 다시 쓰인 1970년대 한국미술

    1970년대 한국은 산업화와 권위정치, 도시화와 정보화가 빠르게 교차한 시기였다. 미술가들은 단순한 회화나 조각의 재현을 넘어 행동(행위)과 개념(개념미술)의 언어를 통해 예술의 본질과 사회적 역할을 다시 물었다. 이 시기는 ‘전위미술(avant-garde art)’이란 이름 아래,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 본격화된 시대였다. 한국 전위미술의 흐름은 서구 미술의 영향을 받았지만 단지 수용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제도와 사회의 틈을 파고들어, 예술이 현실과 맞닿는 방식으로 재정의되었다. 본론에서는 먼저 초기 전위 집단과 행동미술의 등장, 다음으로 개념미술과 제도적 확장, 그리고 전시를 통해 본 글로벌 연결과 그 의미를 살펴본다.

    1. 초기 전위미술 집단과 행동의 미학

    1970년대 한국 전위미술의 선구자는 집단 「제4집단(The Fourth Group, 1970)」이다.

    한국전위미술 제4집단
    한국전위미술 제4집단_ACC(아르코미술관) 웹진

    이들은 김구림을 중심으로 1970년 서울에서 결성되어 ‘행동(happening)’과 설치, 퍼포먼스를 통해 권위적 담론에 도전했다. 위키백과 그들은 예컨대 ‘한강살인사건’ 기록 퍼포먼스(1968)나 도심에서의 비물질적 퍼포먼스를 통해 시각예술의 경계를 흐렸다. 이어서 「ST그룹(Space & Time Group, 1969-80)」은 이론적 탐구와 읽기 그룹에서 출발해, 공간·시간·몸·행위를 주제로 한 전시와 이벤트를 진행했다. 위키백과 이들의 전시와 퍼포먼스는 ‘회화나 조각이 아닌 예술’이라는 제안이었다. 즉, 예술 행위 자체가 메시지였고, 그 매개(몸·시간·공간)가 작품이 되었다.

     

    이 시기의 행동미술은 단순히 시각적 충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산업화 속 개인의 존재 조건을 미술적 행위로 환기하는 장치였다. 퍼포먼스의 기록 사진, 영상, 설치물은 ‘기록된 사건’이 되어 이후의 전시에서 다시 소환되었다. 예술가는 더 이상 화면 앞의 존재가 아니라 직접 ‘현장 속의 행위자’였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전위미술이 단지 국내 미술 담론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 현실과 긴밀히 결합했음을 보여준다.

    2. 개념미술과 미술제도의 확장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미술계는 ‘개념(conceptual)’이라는 용어와 맞닥뜨리게 된다. 회화·조각이라는 매체를 넘어선 미술 행위가 가능해졌으며, 작가들은 담론과 아이디어를 매체로 삼았다. 예컨대 「정강자」, 「이건용」 등은 사진·설치·개념적 오브제를 통해 언어와 이미지, 텍스트와 리얼리티의 접점을 탐색했다. 또한 전시 공간이 갖는 장치적 구조—조명·설치·동작—자체가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 미술제도는 기존의 회화 중심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디어와 방식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시 제도에도 반영되었다. 미술관과 갤러리는 회화·조각 중심의 전시에서 벗어나 퍼포먼스·비디오·행위예술을 기획하기 시작했고, 미술비평가들과 작가집단은 국제미술제에 참여하며 한국 전위미술을 세계무대와 접속시켰다. 이러한 제도적 확장은 한국 현대미술사가 이제 단순히 ‘모방-수용’을 넘어 ‘발신-참여’ 단계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3. 전시를 통한 국제 연대와 문화적 확장

    1970년대 한국 전위미술은 국내만의 실험에 그치지 않았다. 예컨대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전시는 국내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MMCA)와 미국 Solomon R. Guggenheim Museum이 공동기획한 전시로, 한국 실험미술을 국제미술사 속 맥락으로 재위치시켰다. lehmannmaupin.com+1 이 전시에서는 1960-70년대의 회화, 설치, 퍼포먼스, 사진,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가 소개되었으며 작가들은 산업화·군사정권·도시화 속에서 변형된 주체성을 탐구했다. 한국 전위미술의 실험은 단지 국내 미술사 속 한 갈래가 아니라, 세계 미술사의 ‘실험적 미학’ 계보에 당당히 자리를 잡는 흐름이 되었다.

     

    또한 1970-80년대 한국 작가들의 비엔날레 참여(예: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와 해외전시 기획은 이들이 단지 국내 관람자를 향한 실험이 아닌 글로벌 담론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시망은 작가들이 아이디어를 국제적 언어로 검증받고 확장하는 장이 되었으며, 한국 전위미술이 세계무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 행동과 개념의 시대가 남긴 미학적 유산

    1970년대 한국 전위미술은 회화와 조각의 범주를 넘어 행동과 개념을 매개로 삼았고, 그 결과 예술은 다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장소가 되었다. 미술가는 더 이상 화면 속 존재가 아닌 ‘현장 속 행위자’였고, 작품은 축소된 객체가 아닌 과정 자체였다. 이러한 미학적 전환은 이후 단색화, 미디어아트, 참여미술로 이어졌으며, 한국 현대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전위미술의 유산으로 기능한다.

     

    1970년대 전위미술이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예술의 사회적 위치’를 새롭게 설정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 작가들은 국가와 제도의 통제 아래에서도 예술을 개인의 발화이자 사회적 저항의 장으로 만들었다. 즉, 전위미술은 미술의 자율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그 자율성이 사회적 발언의 형식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퍼포먼스, 개념작업, 기록예술은 모두 검열과 억압의 틈새에서 표현의 자유를 모색한 결과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1970년대의 전위미술은 단순히 형식의 혁신이 아니라, 예술의 존재 방식 자체를 실험한 실천적 선언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현대미술이 정치적 발언, 환경, 젠더, 기억의 문제까지 확장된 이유 또한 이 시대의 미학적·사상적 토대 위에서 가능해졌다. 결국 ‘행동과 개념’의 유산은 예술을 단지 시각의 영역이 아닌, 사유와 저항의 언어로 확장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VR, 인공지능, 참여형 설치미술을 통해 실험을 지속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1970년대의 ‘행동과 개념’이란 제안을 재해석하며, 기술과 감각, 사회와 예술의 경계에서 새로운 예술언어를 모색하고 있다. 1970년대 전위미술은 단지 하나의 미술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예술이 출발할 수 있는 미학적 좌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