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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상징과 서정: 회화 속 꿈과 기억의 미학 Marc Chagall and the Poetics of Dream and Memory in Modern Painting

📑 목차

    샤갈의 상징과 서정성을 통해 20세기 근대미술의 감성적 변화를 탐구한다.
    〈마르크 샤갈: 사랑과 색채의 시인〉 전시를 중심으로,
    그의 색채와 상징이 한국 미술과 현대 감정문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꿈과 기억으로 그린 회화, 샤갈의 세계

    “나는 내 삶을 그린다. 내 그림 속엔 나의 고향, 사랑, 그리고 하늘이 있다.”
    이 한 문장은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예술 세계를 가장 잘 요약한다.
    20세기 초 러시아 출신의 유대계 화가였던 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문 시인 같은 화가로 불린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기억, 꿈, 사랑, 신앙의 시각적 언어였다.

    샤갈은 입체파나 표현주의와 같은 동시대의 거대한 사조에 속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근대 회화의 정서적 확장을 이끌었다.
    그는 형태나 구조보다 감정과 상징을 중시하며, 회화에 ‘시적 감수성’을 부여했다.
    이 글에서는 샤갈의 서정적 회화가 근대미술에 미친 영향과 함께,
    2024–2025년 한국 전시를 통해 그의 미학이 어떻게 재조명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1. 샤갈의 회화적 언어 — 꿈의 논리로 그린 인간의 내면

    샤갈의 회화는 현실을 모사하는 눈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의 언어로 구성된다.
    그의 작품에는 하늘을 나는 연인, 거꾸로 선 사람, 붉은 말, 파란 하늘 속의 마을처럼 논리적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는 초현실주의보다 한발 앞서, 무의식의 세계를 감성적으로 표현한 회화적 시도였다.

     

    대표작 〈나와 마을 (I and the Village, 1911)〉은 그 상징적 출발점이다. 화면 속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고향 비테브스크의 풍경, 인간과 동물의 교감이 혼재되어 있다. 초록색 얼굴의 인물과 염소, 하늘 위의 집, 그리고 교차하는 시선들은 현실의 질서를 해체하고, 기억과 감정이 중첩된 세계를 시각화한다.

    샤갈 나와마을
    샤갈 나와마을, 1911 (출처: 위키피디아)

     

    샤갈은 색을 단순히 형태를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에게 색은 감정의 파동이며, 사랑과 신앙의 감각적 언어였다.
    푸른색은 영혼의 평화, 붉은색은 사랑과 고통, 노란색은 희망의 빛을 상징했다.
    이처럼 샤갈의 색채는 주제보다 먼저 관람자의 감정에 도달하며, 회화를 ‘보는 예술’에서 ‘느끼는 예술’로 확장시켰다.

    2. 상징과 서정의 미학 — 사랑, 신앙, 그리고 시간의 기억

    샤갈의 예술은 개인적 서사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정서의 기록이다.
    그의 그림에는 유대인의 전통, 고향의 풍경, 신화적 상징, 그리고 인간적인 사랑이 교차한다.
    〈푸른 연인들〉(1937), 〈생일〉(1915), 〈붉은 연인〉(1950) 등의 작품에서 ‘떠오르는 연인’의 장면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사랑이 현실을 초월하는 영적 체험임을 시사한다.

     

    한편 샤갈은 종교적 주제에도 평생 몰두했다.
    〈성서 시리즈〉(Bible Series, 1931–1956)에서는 유대교의 신화와 인간의 고통, 희망의 서사를 색채와 상징으로 재해석했다.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연작은 단순한 기독교적 이미지가 아니라, 전쟁과 박해의 시대 속에서 인간이 느낀 구원과 연민의 상징으로 읽힌다. 그는 현실의 비극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색으로 승화시켜, 기억의 슬픔을 서정의 미학으로 변환했다.
    이 때문에 샤갈의 그림은 언제나 따뜻하면서도 쓸쓸하고, 슬프면서도 희망적이다. 그의 예술은 감정의 깊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복합성을 껴안는다.

     

    3. 샤갈의 미학과 한국 미술의 감성적 수용

    샤갈의 서정성과 상징주의는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 근대미술의 감성적 회화 전통과도 맞닿는다.
    한국에서는 1970~80년대에 본격적으로 샤갈의 전시가 소개되며, 그의 색채 감각과 시적 이미지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이중섭의 정서적 회화, 김환기의 색채 명상성, 그리고 천경자의 감정의 색채화는 모두 샤갈적 서정성을 부분적으로 공유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 향수, 고독, 기억이라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화폭에 담았다.

     

    2024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의 특별전 〈마르크 샤갈: 사랑과 색채의 시인〉은 그의 회화적 언어를 한국적 정서 속에서 새롭게 재조명한 대표적 사례다. 이 전시는 〈나와 마을〉, 〈푸른 연인들〉 등 주요 작품의 판화 및 원화를 중심으로, 샤갈의 ‘꿈과 기억의 미학’이 오늘날 어떤 감정적 울림을 주는지를 탐구했다. 특히 관람객 반응에서 “그림이 음악처럼 느껴졌다”는 평가는, 샤갈의 회화가 시각과 청각, 감정의 경계를 초월한 종합예술적 체험임을 증명한다.

     

    샤갈의 회화가 미술사적으로 갖는 의미는 단순히 서정성에 있지 않다. 그는 형식과 감정의 균형을 재정의한 근대 회화의 전환점이었다. 19세기 말 인상주의가 빛의 물리적 효과를 탐구했다면, 샤갈은 20세기 초 회화에 감정의 ‘내면적 빛’을 불어넣었다. 그는 색채를 통해 인간의 정서를 번역하며, 회화의 기능을 ‘시각적 재현’에서 ‘정신적 공명’으로 확장시켰다. 이런 점에서 샤갈은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의 형식적 흐름보다 앞서, 감성 중심의 회화적 철학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작품 세계는 **‘기억의 미학’**이라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화두와도 맞닿는다. 샤갈에게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감정과 시간, 인간의 정체성을 다시 조립하는 창조적 과정이었다. 이러한 감정적 재구성의 태도는 21세기 예술가들에게도 강한 영감을 준다. 디지털 시대의 작가들이 과거의 이미지를 재해석하거나, 개인적 트라우마와 집단 기억을 시각화하는 시도들은 모두 샤갈의 정신적 계보 위에 있다.

    또한 한국 미술사 속에서도 그의 유산은 ‘감성 회화’의 계보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1977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양근대미술전》 이후, 샤갈은 한국 관람객에게 가장 사랑받는 서양화가 중 한 명이 되었으며, 1999년 《샤갈 회고전》을 기점으로 그의 회화적 감성이 대중 미술 감수성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한국 화단에서도 감정의 순수성과 색채의 서정성이 강조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샤갈은 그렇게 한 세기를 넘어, **‘감정으로 세계를 그리는 법’**을 예술사에 남겼다.

     

    4. 기억의 시학 — 현대 전시 속 샤갈의 재해석

    최근 한국 미술계에서는 샤갈의 미학을 단순한 낭만주의가 아닌 ‘기억의 시학’(Poetics of Memory) 으로 읽으려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2025년 예정된 **부산시립미술관 기획전 〈기억의 색: 샤갈에서 현대까지〉**는 샤갈의 색채를 현대 작가들의 감정 구조와 연결지으며,
    그의 시적 언어가 오늘날의 감정사회와 어떻게 대화하는지 탐구할 예정이다.

     

    또한 한국의 젊은 작가들—정직성, 최지은, 양유연 등—은 샤갈의 이미지 언어를 차용하거나 변형하여 **‘개인적 기억의 회화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샤갈의 유산은 단순한 미술사적 영향이 아니라, 오늘날 예술가들이 감정과 기억, 시간의 서사를 다루는 방법론으로 살아 있다.

     

    결론. 샤갈이 남긴 감성의 미학, 그리고 우리의 내면

    샤갈의 회화는 꿈과 현실, 기억과 사랑을 잇는 다리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색으로 번역하고, 감정을 구조로 만들었다.
    그의 그림은 이해가 아닌 공감으로 다가오며,
    예술이 이성보다 감성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의 전시들이 샤갈을 다시 호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예술은 단지 과거의 낭만이 아니라, 감정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예술적 언어다.
    샤갈의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여전히 꿈꾸고, 사랑하고, 기억한다.